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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Physiology &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 Vol. 36 , No. 4

[ REVIEW ARTICLE ]
Journal of Physiology &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 Vol. 36, No. 4, pp. 105-112
Abbreviation: J Physiol & Pathol Korean Med
ISSN: 1738-7698 (Print) 2288-2529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5 Aug 2022
Received 31 Mar 2022 Revised 11 Aug 2022 Accepted 20 Aug 2022
DOI: https://doi.org/10.15188/kjopp.2022.08.36.4.105

일차 사료와 지리 정보를 통한 동제학교에 대한 고찰
하기태1, * ; 최준용2, 3 ; 김기봉2, 4
1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한의과학과
2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한의학과
3부산대학교한방병원 한방내과
4부산대학교한방병원 한방소아과

Investigation of Dongje School Based on the Primary Historical Data and Geographical Information
Ki-Tae Ha1, * ; June-Yong Choi2, 3 ; Kibong Kim2, 4
1Department of Korean Medical Science, School of Korean Medicine, Pusan National University
2Department of Korean Medicine, School of Korean Medicine, Pusan National University
3Department of Internal Medicine in Korean Medicine,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n Medicine Hospital
4Department of Pediatrics in Korean Medicine,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n Medicine Hospital
Correspondence to : Ki-Tae Ha, Department of Korean medical Science, School of Korean Medicine, Pusan National University, 49, Busandaehak-ro, Yangsan, Gyeongnam 50612, Korea ·E-mail : hagis@pusan.ac.kr ·Tel : +82-51-510-8464


Ⓒ The Society of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The Physiological Society of Korean Medicine
Funding Information ▼

Abstract

Dongje school (同濟學校), alternately Dongje medical school, is generally recognized as the first modern school for Korean medicine. However, there is very limited information concerning its establishment, duration period, governance, location, and contents for teaching. We found several points which are different from popular opinions through investigating news articles of those days and maps. Dongje school has established on June 1, 1906 and the time of its discontinuance is not clear. The school was founded with the cooperation of three former government officials of the Korean Empire, Eungse Lee (李應世), Piljoo Kang (姜弼周), and Dongho Cho (趙東浩) and many people donated fund for supporting Dongje school. However, there is no evidence of national or royal expenditures for operating the school. Dongje school has been established in 76-6, Seohak hill (西學峴), Yeogyeong-bang (餘慶坊), West county (西署), Seoul and moved to Naesum-si (內贍寺) located in Bongsangsi front village (奉常寺前門洞), Indal-bang (仁達坊), West county, at September 1906. The curriculum of the school comprehends several disciplines including literature in Korean and Chinese, mathematics, foreign language, physics, and Western medicine, as well as Korean medicine. Particularly at that time, they thought both of women and men. To elucidate the issue of the governance of Dongje school regarding the national or royal establishment, more information and extensive studies should be needed.


Keywords: Dongje school, June 1906, Seohak hills, Naesum-si

서 론

동제학교(同濟學校)는 흔히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라고도 불리며, 최초의 근대 한의학 교육기관으로서 인식되고 있다1). 동제학교는 1899년 설립된 서양의학 전문교육기관인 관립 의학교에 대응하여, 장용준(張容駿)과 김병관(金炳觀)이 1904년 한의학 교육을 위한 별도의 “대한의학교(大韓醫學校)” 설립을 청원한 것에서 시작하여 1906년에 이응세(李應世), 강필주(姜弼周), 조동호(趙東浩) 등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 기존의 동제학교에 대한 연구는 주로 한의학 교육기관으로서 기능과 역사적 의의에 집중되고 있다2,4-6). 동제학교가 한의학 교육기관이라는 통설에 대한 반론이 기창덕 및 황영원에 의해서 제기되었다2,6). 또한 학교의 설립자, 설립과 폐지 시기, 교육내용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동제학교의 교사(校舍) 위치에 대해서는 표천근은4) “야주개(現 唐珠洞) 奉常寺 南門골에 있는 內膽寺 宮舍”라고 하였는데, 이 학설은 신순식과3) 김남일7) 등에 의해서 인용되었으며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수록되는8) 등 “동제의학교는 내담사(內膽寺)에 설치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내담사의 위치와 시설의 성격이 불명확한 상황으로 이의 구체적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동제학교는 한의학계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중시됨에도 불구하고 설립부터 폐지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따라서 논자는 동제학교가 설립되던 시기의 일차 사료와 조선후기부터 근세까지의 지도 자료 등을 확인한 결과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였으며, 본 논문을 통하여 보고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1. 일차 사료 수집

동제학교와 관련된 일차사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국가전자도서관(https://www.dlibrary.go.kr/) 홈페이지9)에서 “동제학교”나 “동제의학교” 등의 검색어로 검색하여 원문이 제공되는 당시의 신문기사를 위주로 수집하여 인용하였다.

2. 지도 자료 수집

본 연구에 사용된 지도 자료 중에서 도성대지도, 수선전도, 경성시가도, 대경성정도는 모두 서울특별시에서 제공하는 서울역사아카이브(https://museum.seoul.go.kr/archive/NR_index.do)에서 제공받았으며10), 실측도는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https://kyudb.snu.ac.kr/book/view.do)에서 받은 것이다11). 서울시 항공사진 자료는 스마트서울맵(https://map.seoul.go.kr/smgis2/)에서 이미지를 저장하여 사용하였다12).


본 론
1. 동제학교 관련 일차 사료

동제학교와 관련된 일차 사료를 확인하기 위하여, 국가전자도서관9)에 수록된 근세의 신문에서 다수의 기사에 동제학교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였으며, 아래에 날짜순으로 표시하였다. 이 외에도 조선후기에서 근세까지의 사료가 정리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13,14)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하였으나 이러한 국가 공식 문서에서는 동제학교와 관련된 내용이 확인되지 않았다.

1) 제국신문, 1906년 5월 11일 기사

번역: 유신학교와 동제학교. …… ▲이응세(李應世), 강필주(姜弼周), 조동호(趙東浩) 씨가 발기하여 동제학교를 서학 고개에 설치하고 각 과정에 어학을 가르치되,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남자는 밖에서 가르치고 여자는 여자 선생이 안에서 가르친다고 하더라. (Fig. 1)


Fig. 1.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Jeguksinmun, May 11, 1906.

2)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30일 기사

번역: 학생 모집광고. 본 학교에서 오는 음력 이 달 초10일 정오에 개학하오니 배우기를 원하시는 여러분은 남녀와 나이를 막론하고 오늘부터 와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과정. 의학 국한문 산술 어학 물리학. 등교 시간은 오전 11시이고 하교 시간은 오후 4시로 정함. 서서(西署) 여경방(餘慶坊) 서학현(西學峴) 제76통 6호. 동제학교에서 고함. (Fig. 2)


Fig. 2. 
The advertisement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May 30, 1906.

3) 대한매일신보, 1906년 05월 31일 기사

번역: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 씨가 동제학교를 발기하고 그 취지가 이와 같다. “무릇 널리 동포를 구제하는 것은 자선사업이고, 영재를 교육하는 것은 문명개화의 급선무이다. 현재 전 세계 열강들이 실용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다. 구제·자선(救濟慈善) 사업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의약을 근간으로 하고 다음으로 증상을 살펴봄에 정밀함에 더욱 정밀함을 구하여 반드시 심오함에 이르도록 힘쓰니, 이는 대체로 인명(人命)과 위생(衛生)을 중시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대한제국에 병원·약포(藥鋪)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이 경영하는 것과 관(官)이 설립한 약간을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겨우 ‘입문’[醫學入門] 몇 권만을 읽고 쉽게 의사라 칭하며, ‘증맥’[證脈方藥合編] 1편을 대강 공부하고 곧바로 약을 처방하니, 그 어리석음과 미련함으로 사람을 잘못되게 함에 더욱이 식자(識者)들의 탄식이 오래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학교의 설립은 가히 완흥(菀興)이라 할 만하나, 여성을 교육함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실시되고 있는 것이 없으니 유감(欠憾)이 없지 않다. 이러한 까닭으로 자선·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자금을 모아 이 학교를 설립하여 동제라 이름하였으니, 동제란 남녀 동포를 아울러 구제한다는 뜻이다. 그 학과 과정은 의학, 국한문, 산술, 외국어학, 물리학 등 여러 과목을 중심으로 한다. 한 학교 내에 두 공간을 만들어 바깥쪽은 남자교사가, 안쪽은 여자교사가 각각 행정과 교육을 담당한다. 특히 본교 내에 별도로 약포 1곳을 설치하여 이로써 널리 구제하는(普濟) 사업을 실시하고, 또한 의술의 진보를 증험하고자 한다. 본교 교과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가르쳐 이로써 개화문명 진보에 바탕이 되게 하고, 위생의 학술을 취하고자 한다.”2) 오로지 자선과 군자의 개명(開明)에 뜻을 두었으며 안팎을 막론하고 같은 뜻으로 찬성하니 실로 동포의 행복일 것이다. (Fig. 3)


Fig. 3.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May 31, 1906. The red boxes indicates the area of translated in current Korean.

4) 만세보, 1906년 6월 28일 기사

번역: 동제학교를 설치함. 육군 부장 이근호(李根호) 씨가 동제학교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의술(한의학)과 외국어 등의 과정을 가르칠 것인데, 그 학교 안에 남자와 여자의 학교 두 곳을 별도로 정한다고 한다. (Fig. 4)


Fig. 4.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Mansebo, June 28, 1906.

5)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 1일 기사

내용이 대한매일신보, 1906년 05월 31일 기사와 거의 유사하여, 번역을 생략함. (Fig. 5)


Fig. 5.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July 1, 1906. The red boxes indicates the area of translated in current Korean.

6)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7일 기사

번역: 동제학교 여름 학기 시험. 의학 우등생은 강인선, 전광옥, 구종식, 안승철, 김영창, 한문이고, 갑반(甲班)은 김형시, 이종국, 문만옥, 홍형린이며, 을반(乙班)은 김정옥, 조덕선, 최구석, 이복룡 등의 사람이더라. (Fig. 6)


Fig. 6.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August 7, 1906.

7)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8일 기사

번역: 봉현(鳳峴)거사 이원용(李원容)

내가 귀 학교의 취지가 지극한 자선의 업과 의학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읽고 나도 모르게 글을 끌어 안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아! 우리의 행운이다. 성스러운 덕이 융성한 때, 영재들을 제대로 발양할 때이다. 위로 성은을 보좌할 계책이 없고 아래로 영재를 교육할 길이 없어서 뜻이 있어서 행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이 동제학교의 설립 규칙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고금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다. 대체로 산학을 배우는 것은 사대부가에서 가끔 있었으나, 의학이나 산술, 외국어에 이르면 선각자가 아니면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였다. 사람이 역병을 앓으면 비록 좋은 의사가 있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이 많다. 이런 후에야 불우함에 대한 한탄이 없다. 생명을 지키는 길은 비록 이윤(伊尹)과 여망(呂望)에게 지혜를 묻고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에게 꾀를 빌려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개교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먼 곳에서 유학하는 자가 날로 줄을 이으니, 그 학교의 왕성할 것은 굳이 깊이 계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우리 황상께서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는 은혜와 천지와 같은 덕을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천만 가지 일에 재물이 풍족한 연후에 일이 여물게 되는데도, 귀 학교를 새로 세우는 데 장인의 도구와 매일의 준비가 매우 궁핍하다고 들었으니 탄식을 금하지 못하겠다. 홍범의 오행에서 먼저 그 사물을 계산하였고, 대학 십장에서 절반은 재물을 논하였다. 재물의 부족은 실로 작은 우려가 아니다. 날 때는 말로 먹고 살았으나 여생에 정신을 차리듯이, 양심이 방종하다가도 폐에 사무칠 때가 있다. 삼가 5원의 돈으로 간략히 보태기를 바라며 감히 터럭 같은 재물을 더한다. 엎드려 바라기는 흥하는 때가 이르고 신성한 일에 주의를 기울여서 반드시 천만 사람을 개명시키기를 이마를 땅에 대고 기원합니다. (Fig. 7)


Fig. 7.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August 8, 1906.

8)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12일 기사

번역: 동제학교 찬성 성금은 다음과 같다.

觀察 朱錫冕, 知事 羅世煥, 知事 李炳鼎, 協辦 李煕斗, 承旨 朴泰秉, 從二品 李根培, 局長 崔文植,

主事 孫昌源 5환

知事 洪宅柱 4환,

正領 李根馨, 郡守 洪泰윤 3환

副卿 金敎碩, 姜昶欽, 主事 趙恒璣, 正領 金宗源, 侍從 禹恒鼎 2환 50전

協辦 李漢英, 從二品 崔錫肇, 從二品 李應翼, 課長 崔璟亨, 正尉 李會臣, 正三品 金永模, 正三品 文尙賢, 郡守 安敬煥, 參書 金鎔濟, 正三品 崔漢朝, 參尉 金碩彬, 正三品 任冕宰, 主事 崔載植, 進士 韓弼夏, 崔永哲, 六品 趙康鎬 2환

參領 全在興 1환 50전

郡守 李載윤, 僉知 金基東, 同知 文建鎬, 判書 李裕寅, 敎官 洪德起, 金在秀, 正三品 申昌윤,

郡守 金聲振, 卞錫圭, 郡守 金榮灝, 郡守 安玘煥, 議官 李鍾台, 議官 卞容圭, 議官 張亨燮, 張基駿, 李煕用, 知事 李用善, 同知 韓基윤, 議官 張台鉉, 조弼祥, 皮煕成, 劉한弼, 朱源榮, 參奉 李秉斗, 司果 金永壽, 侍從 崔淵, 參奉 金德起, 主事 조容元, 正三品 河肯一, 參書 千兢植, 正三品 조性協, 侍從 李吉相, 조一顯, 高永錫, 議官 片容基, 敎官 朴基병, 主事 全台憲, 議官 金益壽, 劉한國, 金洙益 1환. 미완. (Fig. 8)


Fig. 8.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August 12, 1906. The red boxes indicates the area of translated in current Korean.

9) 대한매일신보, 1906년 9월 19일 기사

번역: 은혜롭게 교사(校舍)를 내리심. 강일(姜鎰), 이춘세(李春世) 두 사람이 위생(衛生) 교육에 열심이라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재정을 모아서 동제학교를 창설하고 여러 명의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이전의 보도에서 이미 알렸다. 교사(校舍)가 좁아서 얼굴을 맞대기도 힘들더니, 황제 폐하께서 통촉하시고 가상히 여기시어 내섬사(內贍司)를 특별히 하사하시니 청사를 옮기고 지난 목요일 만수성절(萬壽聖節)에 경축 연회를 성대히 베풀어 만세 삼창을 하였다. 장용준(張容駿) 씨는 특별히 많은 돈(百金)으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학업을 진취하고 나라의 명운을 발달할 목적으로 연설하고 권면(勸勉)하였다고 한다. (Fig. 9)


Fig. 9.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September 19, 1906. The red boxes indicates the area of translated in current Korean.

10) 만세보, 1906년 10월 14일 기사

번역: 동제학교를 확장함. 서학 고개에 설립하였던 동제학교는 봉상시앞골 앞의 내섬사(內瞻司)로 이전하고 학교의 임무를 더욱 확장하여 한의학(漢醫學)과 서양의학(西醫學)을 가르칠 것인데, 학생은 연령 20세 이상 30세 이하로 가려 뽑는다고 한다. (Fig. 10)


Fig. 10.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Mansebo, October 14, 1906.

11) 황성신문, 1906년 11월 06일 기사

번역: ○찬문야학교(贊文夜學校)를 서부(西署) 내섬계(內贍契) 봉상사(奉常司) 골 동제학교에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오니 배우기를 원하는 여러분은 아무 날짜에나 오후 7시에 본 학교에 오셔서 입학하시기 바람. 과목. 일본어, 수학, 지리, 역사, 법학. 찬문학교장 김중환(金重煥). (Fig. 11)


Fig. 11.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Huangseong-Shinmun, November 6, 1906.

12) 대한매일신보, 1908년 6월 16일, 17일, 18일 기사

번역: 서부 봉상시 골 내섬사(內贍司) 안의 동제측량학교(同濟測量學校)에서 측량 속성 과정을 설치하고 학생을 모집하니, 배우기를 원하는 여러분은 이달 20일 안으로 임시사무소로 와서 상의하시기를 바람. 서대문 밖 경부철도(京釜鉄道) 주차장 건너편 운수회사 안. 동제측량학교 임시사무소에서 고함. (Fig. 12)


Fig. 12. 
The news article recorded in Daehan Maeilsinbo, June 16-18, 1908.

2. 동제학교 관련 지도 자료

이상의 신문기사에서 동제학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서학현(西學峴)과 내섬시(內贍寺)1)가 나타나는데, 조선후기에서 근세까지의 지도 중에서 해당 지명이 표시되어 현재의 위치와 비교하기에 적절한 것을 아래와 같이 나열하였다.

1)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도성대지도는 가로 213 cm, 세로 180 cm로 현존하는 서울 고지도 중에서 가장 큰 정교한 채색 지도로 도성의 방명(坊名)과 329계(契)의 위치를 정확히 밝히는 등 다른 도성도에 비하여 많은 양의 정보와 자세한 위치를 담고 있다. 제작 연대는 영조 29년(1753)에서 영조 35년(1759) 사이로 추정된다10). 해당 지도의 좌측 중간에 경희궁과 육조거리의 사이에 봉상시(奉常寺), 내섬(內贍), 내섬내계(內贍內契) 등의 지명이 있으며, 그 아래쪽 경희궁 내수와 백운동천이 만나서 청계천을 이루는 송기교(松杞橋) 아래쪽에 선공감(繕工監)과 가까운 위치에 서학(西學), 서학내계(西學內契), 서학동(西學洞) 등의 지명이 있다(Fig. 13).


Fig. 13. 
Location of Dongje school in Dosungdaejido.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2) 수선전도(首善全圖)

수선전도는 서울역사박물관과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한 목판본의 두 가지가 있으며, 고려대 목판본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대략 184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고,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목판본으로 인쇄 후 산과 하천, 궁궐을 엷게 채색하고 상단과 하단에 기록을 추가하였는데, 하단 간기(刊記)의 “甲子完山重刊”를 토대로 1864년에 전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한다10). 도성대지도에 비하면 매우 소략하게 그려져 있으며, 동제학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봉상(奉常), 내섬(內贍), 서학(西學) 등이 기록되어 있다(Fig. 14).


Fig. 14. 
Location of Dongje school in Suseonjeondo.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3) 대동여지도 도성도(大東輿地圖 都城圖)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동여지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1861년에 제작한 것으로 그 일부인 도성도10)는, 1840년대에 제작한 수선전도와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한양 서부의 지명 표시는 두 지도가 상당히 차이가 있는데, 내섬시에 대한 표시는 나타나지 않고 서학현(西學峴)의 위치는 표시되어 있다(Fig. 15).


Fig. 15. 
Location of Dongje school in Daedongyeojido-Dosungdo.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4) 실측도(實測圖)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2책 34매의 실측도(實測圖)의 28면에는 서서인달방(西署仁達坊)의 내섬동내섬사(內贍洞內贍司)의 측량도가 수록되어 있다11). 해당 측량도는 1:200의 축적으로 융희(隆熙) 2년(1908년) 5월 14일에 정리국(整理局) 기수(技手)인 이계홍(李啓弘)이 작성한 것이다. 내섬시의 토지 모양과 부지 상의 건축물에 대하여 간략하게 묘사하고, 토지의 경계에는 길의 위치와 내섬시와 접한 토지의 지번을 표시하였다(Fig. 16). 내섬시의 내부 구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정리국은 통감부 시기의 황실 시설을 조사하고 측량하여 국유화하는 작업을 맡은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5).


Fig. 16. 
Survey chart of Naesumsi in Silcheukdo.

5) 경성시가도(京城市街圖)

경성시가도는 1927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1:7,500의 지도로서,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강북지역을 그린 지도이다10). 경복궁 내에 전면을 막는 총독부가 위치해 있고, 육조거리가 청계천과 만나는 부위가 확장되어 태평로가 개설되고 구 서울시청사가 부청(府廳)으로 표시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가 완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주동(唐珠洞) 근처에는 도성대지도와 수선전도에 표시된 백운동천과 근처의 옛길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봉상시와 내섬시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태평로 옆의 서학당길은 현재와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보인다(Fig. 17).


Fig. 17. 
Location of Dongje school in Gyeongseongsigado.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6)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

대경성정도는 1936년 지성당(至誠堂)에서 경성부의 교열을 거쳐 발행한 전체 17장의 서울 지도로서 맨 앞의 대경성정도일람도는 1:25,000의 축적이고 나머지 분도(分圖)는 1:6,000의 축적이다. 경성시가지계획과 경성토지구획정리지구가 발표된 1936년에 제작되었으며, 지번을 기록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10). 지도의 당주정(唐珠町) 95번지에 실측도에 수록된 내섬시의 토지 모양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옆의 당주동 128번지의 넓은 부지 봉상시의 위치로 추정된다. 백운동천과 근처의 옛길의 모습도 조선후기와 유사하게 보존되어 있다. 태평로 인근의 경우는 현재와 유사하며, 서학고개의 위치는 현재의 서학로길 중 지대가 높은 위치에 비정하여 표시하였다(Fig. 18).


Fig. 18. 
Location of Dongje school in detailed Daegyeongseongjeongdo.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7) 서울시 항공사진

서학고개에 있었다는 최초의 동제학교 위치는 구체적인 지명 등이 없어서 확인하기 어렵기도 하고, 현대의 지도와 일제강점기의 지도에서 태평로 근처의 서학당길은 큰 차이가 없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내섬시가 위치한 당주동 근처는 해방 이후에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므로 서울시 항공사진을 통하여 시간에 따른 변화를 확인하였다12). 1978년 항공사진과 1984년 사진을 비교한 결과 해당 지역에 많은 차이가 확인되었다. 특히 광화문광장 쪽에서 세종문화회관 남측 도로인 현재 세종대로 23길을 내고, 새문안로5길 19의 로얄빌딩, 세종대로23길 54의 세종아파트, 건너편의 세종대로 23길 47의 미도파광화문맨션, 새문안로3길 12의 신문로아파트 등을 신축하는 재개발 과정에서 많은 도로와 지번이 멸실된 것으로 보인다. 내섬시가 위치하던 당주동 95번지의 지번도 멸실(滅失)되었고, 가장 가까운 위치는 현재의 세종아파트(세종대로23길 54, 당주동 100번지)와 그 앞 도로 일대로 생각된다(Fig. 19). 내섬시와 인접한 봉상시의 경우 당주동 128-27번지(새문안로 3길 15) 동원빌딩에 해당하며, 현재 해당 건물 앞에 봉상시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12).


Fig. 19. 
The location of Naesumsi indicated in aerial photography of Seoul. The blue dot line indicates the speculated location of Dongje school. Green line indicates the waterway. The red line shows the road which was previously existed in Chosun dynasty. The red dot line shows the road which is now disappeared. The yellow line presents the road constructed in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The ocher line presents the road constructed between 1978 and 1984.


고 찰
1. 동제학교의 설립 및 폐지 시기에 관하여

본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제학교에 대해서는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조선 왕조의 공식 문서에는 언급이 없으며 당시의 신문들에 관련 기사가 나타나는데, 동제학교와 관련된 당시의 신문 기사를 정리하면 Table 1과 같다.

Table 1. 
Summary of news articles related with Dongje school
날짜 신문 내용요약
1906.05.11 제국신문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가 동제학교를 설립
1906.05.30 대한매일신보 동제학교 학생 모집 광고, 개교일자와 위치 정보 포함.
1906.05.31 대한매일신보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가 동제학교를 설립한 취지, 동제의 뜻은 동포남녀를 구제함.
1906.06.28 만세보 육군부장 이근호가 동제학교를 설립.
1906.07.01 대한매일신보 동제학교의 설립 취지.
1906.08.07 대한매일신보 동제학교 여름 시험의 결과를 발표함.
1906.08.08 대한매일신보 이원용이 동제학교의 설립 취지에 찬성하고 기부금을 냄.
1906.08.12 대한매일신보 동제학교에 찬성금을 낸 명단.
1906.09.19 대한매일신보 강일, 이춘세가 설립한 동제학교에 고종황제가 내섬사(內贍司)를 하사하여, 교사를 이전함.
1906.10.14 만세보 동제학교의 이전 확장함(奉常前門洞前 內瞻司로 移設).
1906.11.06 황성신문 찬문야학교를 西署內贍契奉常司洞同濟學校에 設立하고 학생을 모집함.
1908.06.16~18 대한매일신보 西部奉常司洞內贍司內 同濟測量學校에서 학생을 모집함.

기존에 동제학교의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한의학계에서는 동제의학교의 설립 시기를 표천근의 의견에 따라서 1905년 4월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4).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동제의학교 항목에서 “고종이 1904년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관립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정의하고 있다. 내용에서는 1904년 4월에 장용준 등이 설립을 청원한 대한의학교(大韓醫學校)가 곧바로 고종의 허가에 의하여 내담시(內膽寺) 관사에 설립되어 1905년 4월부터 한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8). 이러한 기술은 신순식 등의 한국한의학사재정립에서 “고종 8년”으로 기술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3). 그러나 당시의 일차사료만으로 판단을 하면 장용준 등이 1904년에 설립을 청원한 대한의학교는 실제 설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1906년 5월에 동제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보는 황영원의 견해2)가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차사료를 살펴보면, 동제학교와 관련된 최초의 신문기사는 1906년 5월 11일 제국신문 기사로 유신학교와 동제학교의 설립 사실을 알리는 기사이지만, 해당 기사에는 명확한 설립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두 번 째 기사인 5월 30일의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오는 음력 이 달 초10일 정오”로 개학 일자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1906년 5월 30일은 음력 4월(윤달) 8일로 해당 월의 초 10은 양력으로 1906년 6월 1일이므로, 기존 1904년 설, 1905년 6월 설, 1906년 5월 설 등은 모두 이에 맞추어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동제학교의 폐지 시기와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3년간 존속했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가 동의하고 있으나2-4,7,8), 설립시기에 대한 의견 차이에 따라서 1907년3,4,7,8)과 1908년2)으로 나뉘고 있다. 일차사료에서 동제학교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1906년 11월 6일 황성신문 기사에 찬문야학교 학생 모집 광고 기사가 마지막이다. 해당 기사 내용으로 볼 때, 낮에는 동제학교가 교사를 이용하고 밤에는 찬문야학교가 사용하는 일종의 병설 형태로 생각된다. 주목할 내용은 1908년 6월 17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동제측량학교 학생 모집 광고이다. 해당 기사에서는 “서부 봉상사동 내섬사(內贍司) 안의 동제측량학교”라고 하여, 1908년 6월 이전에는 동제학교가 폐지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동제”라는 동일한 명칭을 사용한 것과 동제학교와 교사를 공유한 찬문야학교의 설립자 김중환(金重煥)이 탁지부의 문부조사위원(文簿調査委員), 지계아문(地契衙門) 부총재 등을 역임하여 당시의 토지측량사업을 주도한 인물이므로16), 동제측량학교와 동제학교가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고종의 퇴위와 동제학교의 폐교를 연계하여 이해하는 한의학계 통설3,4,7,8)과는 다른 황영원의 견해2)에 따라서 1908년까지 동제학교가 존속하였다고 하더라도, 동제학교의 실제 운영 기간은 3년은 되지 못하고 길어야 2년 남짓이 될 가능성이 높다.

2. 동제학교의 지배구조에 관하여

한의학계에서는 동제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고종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최초의 근대적 관립 한의학교육기관으로 생각하고 있다3,4,8). 그러나 황영원은 이에 대한 근거를 의심하였으며2), 일차사료에만 근거하면 고종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아래의 몇가지 점에서 동제학교의 지배구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동제학교의 설립자와 관련되어 1906년 5월 11일 제국신문과 1906년 5월 31일의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는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 3인이 발기하여 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6년 6월 28일 만세보에는 육군 부장(副長) 이근호(李根호) 씨가 동제학교를 설립하였다고 하였고, 1906년 9월 19일 대한매일신보에는 강일(姜鎰), 이춘세(李春世)가 설립한 동제학교라는 표현이 나온다. 강일(姜鎰), 이춘세(李春世)는 강필주와 이응세의 이명 또는 오식(誤植)으로 생각되며, 이근호(李根호)는 1906년 육군부장으로 임명된 기록이 있는 대한제국기의 고위 관료이자 이후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李根澔; 1860-1923)17)로 추정된다. 강필주는 대한제국기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화가인 위사(渭士) 선생으로 1911년에 서화미술회 발족인 13인 중의 한명이다17). 송희경에 의하면 강필주는 동제학교의 설립자일 뿐 아니라 부인 김씨는 이 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의학전문과(醫學專門科)와 중등보통학(中等普通學)을 가르쳤으며, 동제학교 설립 이후 전선의회(全鮮醫會)의 평위원으로 위촉 받았고 일제강점기의 의생 면허도 취득하였다고 한다18). 이응세(李應世)와 관련해서는 민간 한의사라는 견해가 있지만3),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고종 31년 갑오(1894) 2월 8일(을묘) 조(條)에서 함원전(含元殿)에서 응제(應製)를 과차(科次)한 내용에서 부(賦)에서 초삼하(草三下)를 맞은 29명의 유생 가운데 이응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고, 고종 42년(1905, 을사)에는 학부(學部) 주사(主事)로 임용되는 등 총 12회 언급되고 있다19). 1894년에서 1905년까지 공직에 근무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제학교의 설립자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으며, 민간 한의사는 아니고 관료 출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설립자 중 나머지 한명인 조동호는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11월 13일(병오)에 각궁 사무정리위원으로 임명된 정3품 조동호(趙東浩)와 동일인으로 생각되며, 역시 관료 출신으로 한의사는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표천근의 논문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동제학교 설립자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으나4,8), 신순식 등은 장용준, 홍철보, 김병관 등이 민간 한의인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 등의 발기와 협조를 얻어 고종에게 청원을 하였고, 고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여 바로 동제학교의 설립을 허가한 것으로 기술하였다3).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제학교 설립 시점을 기준으로 강필주는 도화서 화원 출신, 이응세와 조동호는 관료 출신으로 한의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황영원은 한의사 강필주(姜弼周), 교육사업에 관심을 가진 이응세(李應世)와 조동호(趙東浩) 등의 발기로 동제학교가 설립되었고, 학교 설립 이후 교장은 전 위생부장이었던 이근호(李根澔)가 맡았다고 기술하였으나2),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중요한 논점은 동제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고종에 얼마나 관여하였는지 여부이다. 신순식 등은 광무 8년(1904) 장용준, 홍철보, 김병관이 대한한의학교를 설립할 것을 고종에게 주청(奏請)하여 곧바로 학교 설립을 허가 받은 것으로 기술하였다3). 그러나 해당 내용의 참고문헌으로 언급한 기창덕의 논문에는 광무 8년의 청원은 고종이 아니라 학부(學部)에 한 것이며 홍철보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으며, 광무 10년의 동제학교의 설립은 별개의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6). 일차사료인 황성신문 1904년 4월 18일자의 기사9)를 보아도 기창덕의 서술이 정확한 것으로 생각되며, 황영원도 동일하게 1904년의 청원이 “곧바로 결실을 맺지는 못”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2). 홍철보의 이름은 표천근의 글에 처음 등장하지만 고종이 직접적으로 학교의 설립을 허가하였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4). 다만 표천근은 “동제의학교가 1년간 유지하여 오던 중 탁지부(度支部)로부터 경비가 지출되지 않아 중단되게 되었을 때에 다시 고종에게 주청하여 고종 사용 재산인 명례궁(明禮宮)의 친용금(親用金)을 지불하게 되어 3년간이나 더 계속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4). 해당 기술은 학교의 설립시에는 국가에서 직접 운영을 하였고 1년 이후부터는 고종의 내탕금을 사용하였다는 통설의 근원이 되고 있으나, 일차사료에서는 해당 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어서, 황영원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2).

그러나 1906년 9월 19일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종이 내섬사(內贍司) 관사를 하사하였다”는 것과, 교사 이전 행사가 고종의 탄신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 음력 7월 25일)에 진행한 것으로 보아 고종 황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다. 특히 시위(侍衛) 겸 전의(典醫)로 고종을 지근에서 모시던 장용준(張容駿)이 행사에 참석하였고, 동제학교의 설립자인 강필주는 도화서 화원으로 노안도(蘆雁圖)를 고종에게 바쳤으며 이응세와 조동호는 관료 출신으로서 고종의 일정한 관심 아래 동제학교의 설립과 운영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동제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실제로 정부나 고종의 내탕금이 활용되었는지는 동제학교의 관립(官立) 여부와도 밀접한 내용이므로, 앞으로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동제학교의 운영에 있어서 많은 기부자들의 찬조금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1906년 8월 8일 봉현거사(鳳峴居士) 이원용(李원容)이 기부금 5환을 낸 것을 시작으로, 1906년 8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총 73명이 136환의 금액을 찬조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부자의 대부분(59명)에서 이름 앞에 관직이 표시되어 있고, 14명만이 관직명이 없었다. 찬조금의 물꼬를 튼 최초의 기부자인 봉현거사 이원용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지만, 찬성문의 한문 수준으로 보아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찬조금 모금이 다수 신사층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때 동제학교에 대한 세간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이 1906년 9월 19일 대한매일신보 기사에 나타나는 고종의 내섬시 건물의 하사와 연결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원용을 포함한 총 141환의 찬조금이 현재의 가치로 어느 정도였는지를 명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환(圜)은 광무 5년(1901) 2월의 화폐조례에 따른 금본위제도의 채택으로 도입된 화폐단위로, 순금 2푼(750 mg)에 해당하며 1환은 100전(錢), 기존 화폐 50량(兩)이 1환으로 정해졌다20). 액면가인 금으로 환산하면 105.75 g이며, 1906년 당시 수삼 1근의 시장 가격이 300량(5환) 수매가격이 210량(4환 20전)이었으므로 대략 수삼 28.2근(수매가로는 33.57근) 정도로 환산된다21). 2021년 금의 평균 기준가격이 g당 66,261원이므로 금 105.75 g의 현재 환산 가격은 대략 7,007,100원에 해당하며22), 인삼을 기준으로 하면 2020년 금산군의 수삼 1근(750 g)의 평균가격은 31,758원23)으로 895,575원에 해당한다. 물론 금과 수삼의 상대가치가 1906년 당시와 현재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비교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찬조금 만으로 학교의 경영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동제학교의 위치에 관하여

표천근이 동제학교의 위치에 대하여 “본교는 야주개(현 당주동) 봉상시 남문골에 있는 내담사 궁사에 정하고”4)라고 한 이후에, 신순식과 김남일 등이 모두 이것을 따랐으며3,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그대로 실리는 등8) 통설이 되고 말았다. 기창덕과 황영원의 경우에는 위치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는데2,6), 그들이 일차사료를 인용하였다는 점에서 위치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기 보다는 동제학교의 위치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론과 Table 1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동제학교와 관련된 일차 사료에는 1906년 6월에 개교할 때는 서학현(西學峴)에서 시작하였다가, 그해 9월에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내섬시 관사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학현(西學峴)은 서학고개, 서학재 등으로도 불리며, 근처에 조선시대 사부학당(四部學堂)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는 야트막한 고개로서, 해당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서서(西署) 여경방(餘慶坊) 서학현계(西學峴契)로 불렸다24). 현재의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광화문빌딩까지 이어지는 서학당길의 서편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학의 위치는 기존에 태평로 1가 60, 61번지, 즉 현재의 코리아나호텔, 조선일보사, 시스퀘어빌딩, 태성빌딩, 서울특별시의회 등이 위치한 지역으로 생각되었으나24), 최근의 연구에 의하여 태평로 1가 62번지로 현재의 광안빌딩과 한국금융사박물관 위치로 고증되었다25). 1906년 5월 30일 대한매일신보사의 광고에 따르면, 동제학교의 최초 위치는 서서(西署) 여경방(餘慶坊) 서학현(西學峴) 제76통 6호로 나온다. 그러나 해당 주소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태평로가 건설되고 바뀐 현재의 주소 체계와는 매우 다르므로, 조선시대 주소체계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사데이터베이스13)에 포함된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중에서 진희성(秦熙晟)이라는 대한제국기 관원의 주소지가 서학현(西學峴) 제76통 6호로 나온다. 진희성은 1857년 태어나 1891년 무과로 입직하였으며13),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906년 4월 24일에는 잠시 의원면직하였다가 동년 7월 27일 탁지부(度支部) 수도국 사무관으로 재임용되었고, 1909년 9월 29일에 함경남도 도 사무관으로 있다가 다시 의원면직 하였다19). 그의 또 다른 주소지로 서서(西署) 여경방(餘慶坊) 왕궁동(王宮洞) 47통 4호가 있다13). 해당 지명은 일제시대에 서대문정(西大門町) 2정목(丁目)에 속하여 현재에는 종로구 신문로2가, 즉 현재의 경희궁 근처 지역에 해당하는데, 여경방이 현재의 새문안로 남쪽인 것을 고려하면 왕궁동은 경희궁의 남쪽 맞은편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동제학교를 설립할 즈음에 서학현에서 왕궁동으로 이사를 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진희성과 동제학교의 관련성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부족한 상황으로 앞으로 더 상세한 확인이 필요하다.

동제학교의 두 번째 위치인 내섬시(內贍寺)로의 이전에 관해서는 1906년 9월 19일 대한매일신보와 10월 14일 만세보의 기록이 있다. 기존 한의학계 문헌에서 언급되는 내담사(內膽寺)3,4,7)는 명확한 오기인데, 만세보에서도 내첨(內瞻)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오인하기 쉬운 “贍” 자의 자형(字形) 때문으로 생각된다. 두 기록 중에서 9월 19일 대한매일신보는 고종이 내섬시를 하사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해당 기사에 따르면 동제학교의 이전 설치는 고종의 생일 만수성절(萬壽聖節, 음력 7월 25일)인 1906년 9월 13일(목요일)보다는 이전에 완료되고, 경축일에 맞추어 행사를 진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내섬시는 각 궁과 전에 대한 공상(供上)과 2품 이상 관리에게 주는 술 및 왜인과 야인에 대한 음식물 공급, 직조(織造)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서26)로서 정조 24년(1800)에 혁파되어 의영고(義盈庫)에 합병되었다14). 순조 1년(1801)에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혁파할 때에 관청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어느 때인가 다시 복원된 것으로 생각되며, 고종 19년(1882) 12월 29일에 사도시(司䆃寺),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사재감(司宰監), 의영고(義盈庫), 장원서(掌苑署), 사포서(司圃署) 등의 관청과 함께 최종적으로 혁파되었다14). 관청은 혁파되었지만 건물은 그대로 남아서 유지되고 있다가, 고종이 동제학교에 사용을 허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10월 14일 만세보는 내섬시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풍부한데, “奉常寺前門洞前內瞻司”이라고 위치를 밝혔다. 봉상시전문동(奉常寺前門洞) 즉 봉상시앞골은 봉상시 앞에 있던 동네의 이름으로24), Fig. 14의 수선전도에서는 봉상시와 내섬시가 바로 옆으로 붙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Fig. 13의 도성대지도에서는 봉상시 동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의 중간에 내섬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도성대지도의 위치 설명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표천근은 동제학교의 위치를 “야주개(現 唐珠洞) 奉常寺 南門골에 있는 內膽寺 宮舍4)”라고 하였는데, 봉상시 남문골은 봉상시앞골이 더 정확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Fig. 16에는 1908년에 제작된 내섬시 관청의 측량도를 나타내고 있다. 1908년 6월 16일에서 18일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 따르면, 동제학교는 폐교하고 내섬시 위치에 동제측량학교가 설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한일협약으로 설치된 통감부의 황실재산 국유화에 저항하던 고종이 1907년 퇴위하고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을 중심으로 황실재산의 국유화를 진행하던 시기이다4). 실제로 실측도의 첫 두 페이지는 Fig. 20에 나타낸 바와 같이, 밀양의 황실재산의 측량 조사를 위해 파견되는 기사(技師) 강성국(姜聲國)과 기수(技手) 이계홍(李啓弘)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을 명하는 궁내부 장관 명의의 공문서이다. 두 사람이 1908년 당시에 궁내부(宮內府)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產整理局) 측량과(測量課)의 과장(課長)과 과원(課員)으로 재직 중이었으며13) 이후에 나오는 측량도의 작성자가 이계홍인 것을 보면, 해당 실측도는 제실재산정리국에서 황실재산을 조사하면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규철의 논문에서는 국유화된 관청의 목록으로 봉상시만 나오고 내섬시는 나타나지 않지만15), 내섬시 역시 제실재산정리 과정을 피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의학계에서 고종의 퇴위와 동제학교의 폐교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인식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Fig. 20. 
The first and second pages of Silcheukdo (實測圖).

4. 동제학교의 교육 내용에 관하여

한의학계에서는 동제학교를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로 부르면서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1,3,4,7). 기창덕과 황영원은 동제학교에서 한의학만을 교육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한의학계의 통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다2,6).

실제로 일차 사료를 확인하면 Table 2에 나타낸 바와 같이, 의학이나 한의학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는 1906년 5월 11일의 제국신문 기사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한의학과 본국의술(本國醫術), 의학, 위생교육 등 의료관련 교육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초기에는 의학 이외에도 국한문, 산술, 어학, 물리학 등 다양한 과목이 언급되다가 1906년 9월 이후에는 위생교육, 한의학과 서양의학 등으로 과목에 대한 언급이 단순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9월 이후에는 한의학을 포함한 의학 교육 기관으로 변모한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우며, 1906년 8월 7일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 의학과 갑반(甲班), 을반(乙班)으로 구분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의학을 교육하는 반은 별도로 구분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갑반과 을반으로 구분하여 일반적인 교양 교육에 해당하는 글쓰기, 산수, 외국어, 자연과학 등을 가르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교양을 위한 다른 교과목을 가르쳤다고 해서,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기관으로서 동제학교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Table 2. 
Summary of class subject lectured in Dongje school.
날짜 신문 강의 과목
1906.05.11 제국신문 어학
1906.05.30 대한매일신보 의학, 국한문, 산술, 어학, 물리학
1906.05.31 대한매일신보 의학, 국한문, 산술, 외국어학, 물리학 의술의 진보와 위생의 학술을 강조함
1906.06.28 만세보 우리나라 의술(한의학), 외국어
1906.07.01 대한매일신보 의학, 국한문, 산술, 외국어학, 물리학
1906.08.07 대한매일신보 의학, 갑반, 을반
1906.08.08 대한매일신보 의학, 산술
1906.09.19 대한매일신보 위생교육
1906.10.14 만세보 한의학과 서양의학

동제학교의 특징은 한의학을 비롯한 의학 교육을 강조하는 것 이외에도, 1906년 5월 31일 대한매일신보의 취지문에서 “이 학교의 이름을 동제라고 한 것은 남녀 동포를 모두 구제하자는 뜻이다(此학校名, 稱同濟者, 盖同胞男女, 共濟之義也)”라고 한 것처럼, 남녀를 모두 교육한다는 점이다. 물론 요즘의 남녀공학과는 달리, 5월 11일자 제국신문의 기사처럼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남자는 밖에서 가르치고, 여자는 여자 선생이 안에서 가르친다고 하더라”고 한 것처럼 남녀를 구분하여 교육하였다. 5월 30일의 광고문에서도 남녀와 나이를 막론하고 학생으로 모집하고 있으며, 7월 1일의 기사까지 남녀를 함께 교육한다는 내용은 동일하다. 그 이후의 기사에는 남녀 교육의 문제는 별도로 언급은 없으나, 동제학교의 기본적인 방침은 유지되었을 것이다. 황영원은 동제(同濟)라는 교명은 “盖同胞男女, 共濟之義”라고 한 것에서 남녀를 함께 구제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2). 그러나 “同胞男女共濟”의 해석에 있어서 남녀에만 방점을 둘 필요 없이 “동포 남녀를 모두 구제한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동포에 주안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학교 취지문 첫 부분에서 “무릇 동포를 널리 구제하는 것은 매우 선한 일이다(夫普濟同胞, 善之事業也)”라고 한 것과 더 잘 상응하는 해석으로 생각된다.


결 론

이상에서 동제학교가 실재하던 시기의 신문기사라는 일차 사료를 분석하여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동제학교는 1906년 6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하였고, 대략 1908년 경에 문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제학교는 관리 출신의 이응세, 강필주, 조동호가 설립하였으며, 이는 장용준 등의 대한의학교 설립 청원과는 별개의 사건이다. 다수의 대중이 동제학교의 설립에 찬성하는 의미로 기부금을 보탰으나, 탁지부의 예산이나 고종의 내탕금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고종이 비어 있던 관청의 사용을 허가하고 시종 겸 전의인 장용준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정한 연관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제학교는 처음에는 현재의 서울시 중구 정동의 서학길 근처에 해당하는 여경방 서학현 76통 6호에 개설하였다가, 1906년 9월 경에 현재 종로구 당주동 100번지의 세종아파트와 그 앞 도로에 해당하는 인달방 봉상시전문동의 내섬시로 이전하였다. 교육 내용은 한의학 만을 교육한 것은 아니고, 서양의학과 국한문, 산술, 외국어, 물리학 등 다양한 교양 교육을 병행하였다. 또한 당시로는 특이하게 남성과 여성을 모두 교육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한의학을 포함한 의학 교육을 강조하여 최초의 한의학 전문 교육기관으로서 의미가 있으며, 관립의 여부나 고종과의 관련성 등 동제학교의 거버넌스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일차 사료의 발굴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Notes
1) 寺는 절(불교사찰)을 의미할 때는 “사”로 관청을 의미할 때는 “시”로 발음한다.

Acknowledgments

이 과제는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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