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ciety of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 SPECIAL ISSUE ]
Journal of Physiology &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 Vol. 39, No. 6, pp.229-236
ISSN: 1738-7698 (Print) 2288-2529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5 Dec 2025
Received 25 Nov 2025 Revised 27 Dec 2025 Accepted 27 Dec 2025
DOI: https://doi.org/10.15188/kjopp.2025.12.39.6.229

대한동의생리학회 50년: 회고와 반성

이충열*
가천대학교 한의과대학 생리학교실
50 Years of the Physiological Society of Korean Medicine: Retrospect and Reflection
Choongyeol Lee*
Department of Physiology, College of Korean Medicine, Gachon University

Correspondence to: *Choongyeol Lee, College of Korean Medicine, Gachon University, 1342 Seongnamdaero, Sujeong-gu, Seongnam-si, Republic of Korea ·E-mail : cylee@gachon.ac.kr ·Tel : +82-31-750-5419

Ⓒ The Society of Pathology in Korean Medicine, The Physiological Society of Korean Medicine

Abstract

The Physiological Society of Korean Medicine (大韓東醫生理學會, PSKM) was established on November 28, 1975. For the following 50 years, the Society stood at the forefront of the development of the Physiology of Korean Medicine (韓醫生理學, PKM). The academic foundations for PKM were laid by Yoon Gil-Young, and Kim Wan-Hee subsequently developed into a physiology based on the Neo Medicine Discourse(第3醫學論) and Analogical Function System(類機能體系). From the 1950s to the 1970s, the efforts of these two scholars enabled the field of PKM to play a pioneering role within the Korean medicine community, leading the discourse on the development of Korean Medicine. However, the 'scientific and modernized PKM’ advocated by these two scholars faded during the 1980s and 1990s. This paper reviews the current state of PKM as PSKM marks its 50th anniversary, and considers the direction the Society should take. It emphasizes the need to continue the academic lineage of the 'scientific and modernized PKM', which faded after Yoon Gil-Young and Kim Wan-Hee, and advocates for changes in PKM to meet contemporary demands. Furthermore, it argues that this work should be centered around the Society.

Keywords:

Physiology of Korean Medicine, The Physiological Society of Korean Medicine(대한동의생리학회), Scientific and Modernized Korean Medicine, Yoon Gil-Young, Kim Wan-Hee

서 론

한 학문분야가 학계에서 자리를 잡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건들이 있다. 첫째는 대학 교육과정 속에 정규 교과목으로 개설되어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고, 둘째는, 대학원에 전공 석, 박사 과정이 개설되어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할 수 있어야 하며, 셋째는, 학회가 구성되어 전공 연구자들이 함께 학술모임을 갖고 학술지를 발간하여 연구성과를 공유하며 학문의 미래를 토론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인프라가 갖추어져야 한 학문분야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대학의 전공 교과목으로서 ‘한방생리학’1)은 윤길영에 의해 기초가 놓였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한방생리학’ 강좌가 개설되었는지 시기를 특정하는 것은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1955년 동양의약대학이 개교했을 때는 1학년 전공 교과목으로 ‘한방생리학’이 개설되어 강의가 이루어졌다. 김완희, 임일규는 이 강의를 윤길영이 맡았다고 회고한다.2) 그 뒤 1958년부터 2~3년간은 윤길영 대신 이창빈이 ‘한방생리학’ 강의를 담당했다. 그리고 1960년 4.19 직후 학내 문제로 이창빈이 물러나고 윤길영이 다시 학교에 복귀하여 1961년부터는 윤길영이 본격적으로 강의를 맡았다. 이렇게 ‘한방생리학’은 대학 정규 교육과정 교과목으로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학원 석, 박사 학위과정은 1966년 3월 경희대 대학원에 한의학석사 과정이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1968년 2월 22명의 졸업생이 최초로 배출되었다. 한의학박사 과정은 1974년 3월에 경희대 대학원에 처음 개설되었고, 1979년 2월 3명의 졸업생이 최초로 배출되었다.3) 생리학 전공자로는 김완희가 최초로 1968년 2월에 한의학석사, 1979년 2월에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학위과정을 통해 생리학 전공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4) 이후 원광대 등 12개 한의대와 한의전문대학원이 있는 대학에도 한의학 석, 박사학위과정이 순차적으로 개설되어 생리학 전공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대한동의생리학회(이하 제목을 제외한 본문에서는 생리학회로 표기)는 1975년 11월 28일 창립되었다.5) 학회는 창립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한의생리학 분야 발전의 중심에 서있었다. 여기에는 초대 김완희 회장에서 시작하여 역대 회장들과 학회 임원들, 그리고 회원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5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회가 지속되었다는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고 축하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학회 상황을 돌아보면 마냥 축하만 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이 글에서는 학회가 지나온 발자취들을 간략하게 돌아보고 지금의 학회 상황에 대한 반성과 함께 미래 방향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본 론

1. 대한동의생리학회의 출발

1973년 9월에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가 개최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학술대회는 1969년 파리에서 열린 2차 대회에서 한국대표들이 유치한 대회였다. 대표들이 귀국한 뒤 한국내에서 이 학술대회를 개최할 기관을 찾았으나 교섭에 실패하여 한동안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1972년 8월에 최종적으로 대한한의사협회와 경희대가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정리되면서 본격적인 학술대회 준비에 들어갔다.6) 세계침구학술대회 개최가 임박함에 따라 대한한의학회에 분과학회를 구성하여 대회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분과학회 설립이 촉진되어 학술대회 개최를 한달 정도 앞두고 서둘러 몇 개의 분과학회들이 구성되었다. 이에 앞서 1972년 2월 대한한의학회 이사회는 분과학회 조직에 필요한 규정 제정 작업에 들어가 전문 17조 부칙 2조의 규정을 제정한 바 있었고 이 규정이 분과학회 설립을 앞두고 대한한의학회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73년 8월 13일자로 시행되었다.7)

1973년 7월 24일 대한한의학회 이사회에서는 8월 24일을 기한으로 대한한의학회가 주관하여 분과학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고 이에 따라 8월 16일 내과학회(회장 이종형), 17일 부인과학회(회장 강효신), 18일 침구학회(회장 임종국), 21일 신경정신과학회(회장 이섭), 28일 사상분과학회(회장 홍순용)가 구성되었다. 뒤이어 소아과학회(회장 구본홍), 외관과학회(회장 이상점)가 구성되었다.8)

대한한의학회 분과학회 규정 제4조에는 “분과학회는 한방생리학, 한방내과, 한방부인과, 한방소아과, 침구과, 체질의학과, 외과 및 오관과로 구분한다”로 되어 있다.9) 이 규정에는 기초의학회로는 유일하게 ‘한방생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한방생리학’의 당시 위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1975년 11월 28일에 한방생리학회가 구성되었다. ‘한방생리학회’는 기초의학회 중 가장 먼저 설립된 학회로 김완희가 초대 회장을 맡아 초기의 기틀을 닦았다.10)

분과학회의 명칭은 분과학회 규정 제2조에 “분과학회는 제4조에 규정한 1개 과목을 두서하고 분과학회라 칭한다”고 하여 생리학회의 공식적인 명칭은 ‘대한한의학회 한방생리학 분과학회’가 된다.11) 그러나 1983년에 발간된 동의생리학회지 창간호에는 이 명명을 따르지 않고 ‘대한동의생리학회’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회장 창간사에도 한의학이라는 용어 대신 ‘동의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12) 이것은 생리학회 내부에서 당시 공식명칭으로 사용되던 ‘漢方醫學, ‘漢醫學’, ‘漢方生理學’ 보다 ‘東醫學’, ‘東醫生理學’이라는 용어를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대한한의사협회사에 따르면 ‘漢醫學, ‘漢醫師’, ‘漢藥’ 등의 용어를 ‘韓’자로 바꾸자는 논의가 1971년부터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13) 이것은 ‘漢方醫學, ‘漢醫學’이라는 용어가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한의계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6년 의료법 개정을 통해 마침내 ‘漢’이 ‘韓’으로 변경되었다. 분과학회가 조직되던 1973년을 전후해서는 ‘漢醫學’이라는 명칭에 대한 한의계의 불만이 높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2. 대한동의생리학회의 주요 사업

1) 학술대회

생리학회 초창기의 학술대회는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정기총회와 함께 개최되는 동계학술대회와 여름에 개최되는 하계학술세미나가 있었다. 다른 학회와 비교할 때 생리학회 학술모임의 가장 독특한 전통은 하계학술세미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8년 5대 신민규 회장 때 시작된 하계학술세미나는 국내여행마저 쉽지 않았던 당시 여건 속에서 각 대학이 돌아가면서 개최하여 회원들로 하여금 학술교류와 함께 서로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장을 제공하였다. 초창기 하계학술세미나는 특정 주제를 놓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1박 2일로 개최되어 학술세미나가 끝난 후 밤 늦게까지 삼삼오오 모여 진지하게 토론을 벌이기도 해 그 학문적 열기가 대단했다. 그때의 모습이 초기 회원들의 머리 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 대구, 대전 유성, 부산, 변산반도, 무주, 제주, 제천 등에서 하계 세미나가 개최되었으며, 류도곤 회장 재임 때에는 중국 쿤밍에서 해외 학술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참고로 경주 동국대학교에서 개최된 제1회 하계세미나(1988. 7. 30-31)의 주제와 발표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List of presenters and presentation titles for the 1st Summer Seminar14)

Annual publication records and presidency of the Journal of Oriental Medical Physiology

2) 학회지 발간

생리학회 발간 학술지인 ‘동의생리학회지’는 1983년 6월 20일 2대 양기상 회장 재임 때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동의생리학회지’는 2000년 15권 2호까지 통권 22호가 발간되고 2001년부터 동의생리병리학회지로 통합되었다. 이것은 1998년 한국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사업(현재의 KCI 평가 제도)이 시작됨에 따라 학회지의 영세성을 극복하고 학회지 발간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생리학회와 병리학회가 ‘동의생리학회지’와 ‘동의병리학회지’를 합쳐 ‘동의생리병리학회지’를 공동 발간하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이에 2001년부터 ‘동의생리병리학회지’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의학 분야 학회지로는 2002년 침구학회지에 이어 두 번째, 기초 한의학회 발간 학술지로서는 첫 번째로 2003년 12월에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로 선정되었다(등재 후보 학술지로는 2000년 12월에 선정). 지금은 1년에 6회를 발간하는 한의학계의 중견학회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15)

3) 공통교재 발간

1993년 2월 25일 생리학회 주관으로 ‘동의생리학’ 공통교재가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1973년 원광대를 시작으로 1992년 동신대, 세명대까지 전국 11개 대학에 한의대가 설립되었고, 생리학이 국가고시 과목이어서 국가고시 문제 출제를 위한 공통의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 가장 주된 동인이었다(부산대 한의전은 2008년 개교). 하지만 초판 교재에 오탈자가 많아 발간 직후부터 공통교재 개정판 작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또 1996년에는 대한한의학회 주관으로 각 과목별 한의과대학 학습목표가 처음으로 제정되어 생리학회에서도 학습목표에 맞춘 공통교재 개정판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 초판 발간 이후 개정판 작업이 지연됨에 따라 여러 대학에서 자체 생리학 교재를 제작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개정판 작업의 동력도 약화되었다. 오랜 노력 끝에 ‘동의생리학’ 개정판은 2008년에 이르러서야 발간되었다. 그리고 2024년에 제3판 ‘동의생리학’ 교재가 발간되었다.

공통교재 발간은 학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고, 발간을 위한 준비작업 과정에서 교수들이 치열한 토론을 통해 생리학의 학문적 방향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간때마다 작업을 지배한 것은 치열한 학술적인 토론보다는 발간의 시급성이었다. 이 점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3. 한의생리학의 발전과 대한동의생리학회의 역할

1) 윤길영과 한의생리학 분야의 시작16)

한의학의 기초의학분야 중 하나로서 한의생리학은 윤길영에 의해 초석이 놓였다. 윤길영은 1948년 개교한 東洋大學館의 초대 학과장을 맡는 등 일찍부터 대학에서의 한의학 교육에 관여했다. 그리고 ‘한방생리학’이라는 교과목이 한의학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강의가 시작되었을 때 초창기 강의를 맡음으로써 ‘한방생리학’의 내용과 방향을 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1년에는 이런 노력의 결과물로서 한방생리학 교과서 「生理學新講」을 발간했다. 특히 교재 발간에 앞서 윤길영이 쓴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1955), 「漢方生理學의 方法論 硏究」(1966) 두 논문은 한의생리학의 학문적 방향을 정리하여 제시한 것으로 한의생리학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한의생리학은 동아시아 어느 국가에도 없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교과목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한의생리학이라는 분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이 분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이었다.

윤길영은 1955년 발표한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이라는 글에서 “생리학은 주로 인체의 생리 구조와 제반 생리로 발생되는 제현상을 구명하는 학문으로서 병리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한방의학의 기본적인 이론이다”17)라고 정의했다. 또한 “[한방]생리학도 완전한 일개 전문학과로 독립된 체계를 갖춘 서적이 없고 해부 실험을 기초로 연마된 금일의 생리학과 같이 정연한 체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한방생리학’이 “한방의학의 기본 이론으로서 비중이 지대”하므로 한의학의 새로운 발전과 연구를 위해서는 ‘한방생리학’에 대한 분과적 고찰이 필요하다고 쓰고 있다.18) 이 글에서 윤길영은 한의생리학을 서양의학의 생리학과 같은 분과적 특성을 갖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한의생리학이 한의학의 발전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한방생리학’의 연구 방법과 최종목표에 대해서는 “수천 년 전래의 그 奧義를 검토하여 과학적 견지에서 재정리”함으로써 “한의학 전체 부분의 중대한 원리를 천명할 수 있고”, 또 “과학적으로 발달된 현대 생리학을 무리가 없이 정당하게 도입함으로써 斯學을 현대화하여 그 진가를 재현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 현대의학의 미흡한 한 구석을 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윤길영은 ‘한방생리학’이 먼저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한방생리학’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되면 가까운 미래에 현대의학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학문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19)

1966년에 발표된 「漢方生理學의 方法論 硏究」(이하 방법론 연구)20)는 1955년 발표한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과 비교하여 ‘한방생리학’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심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방법론 연구’의 결론에 해당하는 ‘第5 綜括, 生命現象의 分析科學으로서의 意義’에는 ‘한방생리학’을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점과 동서생리학의 상호보완적 관점에 대해 앞선 글 보다는 한층 더 발전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윤길영은 ‘한방생리학’을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점으로 “첫째로 ‘한방생리학’의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막연히 양방의 생리학적 체계에서 비판하고 연구하는 것이고, 둘째로 ‘한방생리학’의 기초이론이 음양오운육기론으로 되었다 하여 상념적 추리에 빠져서 대상관찰을 떠난 음양오행의 관념적 전개에 고혹하는 것이고, 셋째로 양방학설을 억지로 부회시키려 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양방에서 성취한 지식을 무조건 배척하며 현대과학방법의 도입을 기피하고 과거만을 묵수하려는”21) 태도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 “서의학에서 발견된 지식이든 한의학에서 발견된 지식이든 또는 다른 특수과학에서 발견된 지식이든 그것이 생체를 연구하는데 정확한 지식이라면 모두 필요”22)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동서의학의 생리학이 지향해야 할 상보적 관점에 대해서는, “실지 임상의학에 응용되는 생리학은 해부학적 관찰사항으로 축조된 지식만으로는 미흡하니 전체성적 관찰사항으로 축조된 지식도 필요하고 무생물을 다루는 물리학과 화학으로 분석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생명현상을 생명으로 분석관찰한 지식도 아쉽고 일반생리학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개체를 다룰 수 있는 생리학적 방법도 있어야 할 것이다”23)라고 했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윤길영은 전통적인 한의학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한의학이 가진 장점들을 발전시켜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한방생리학’을 만들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방생리학’이 가진 전체성 논리의 장점을 살리면 서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한방생리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황제내경」의 생리 관련 내용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지식으로 채우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윤길영이 제안한 ‘한방생리학’은 한의학 이론(방법론)에 내포되어 있는 과학성을 천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의학의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해서 한의학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면 서양의학과의 ‘相補’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한의학 이론을 연구에서 소외시키고 매우 좁은 의미의 과학화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한의학 연구 방향과 많이 다른 것이다.

2) 김완희와 1970년대의 한의생리학

윤길영의 뒤를 이어 경희대에서 한의생리학 과목을 담당했던 김완희는 ‘제3의학’론, ‘유기능이론’, ‘유기능체계’ 등을 발표하여 윤길영이 기초를 닦아놓은 한의생리학을 더욱 구체화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1972년 「新生理學總論」24), 「臟腑生理學」25), 1973년 「新版臟腑生理學」26)의 발간으로 나타났다.

「新生理學總論」 서문에서 김완희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전체적 입장에서 ⋯ 계통이나 장기기능을 발생학적인 바탕에서 재검토하여 재편성하므로서 이때까지 정체되었던 생리학의 방향에 혁신을 시도한 것이 본서이다”라고 밝히면서, 발생학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 상관성에 의한 장기계통, 즉 유기능적 계통으로 체계지워 해설하고 있다는 점, 생체의 내외환경 및 정신생리 분야에 있어서의 혁신된 이론 등을 이 책의 특징으로 꼽고 있다.27)

「新版臟腑生理學」의 서문에서는 “한의학의 원리적인 면을 구성요소적 분석, 기능적 분석, 현상적 분석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요약함으로써 원천적인 난삽을 해결하고 오운육기적 체계를 유기능체계로 설명할 수 있었던 점은 한의학 현대화에 기여한 바 크다”고 평가하면서, 이 책의 “각 장을 유기능계열장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장기사이의 관계를 기능현〮상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유념을 했고 또한 事項 설명에 있어서는 원문을 註로 처리하여 原意에 벗어남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28)

두 교과서는 모두 서양의학의 발생학, 기관생리학 등에서 유기능이론과 유기능체계를 지지하는 내용을 뽑아 이것으로 교과서 본문 내용을 채우고 있어 얼핏 보기에는 전혀 한의학 교과서 같지 않은 외양을 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한의학계 정서상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 교과서들은 김완희가 평소에 주장했던 ‘한의학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양의학의 지식을 원용하여 새로운 제3의학의 체계를 세운다’는 ‘제3의학’ 담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기능이론과 유기능체계가 전체 교과서의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특징 때문에 김완희가 저술한 한의생리학 교재와 유기능체계 이론은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의학을 서양의학화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김완희는 이에 대해 한문으로만 쓰여 있어야 한의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쓰여 있든 서양의 생의학 지식으로 쓰여 있든 그 본질이 한의학적이면 한의학이라는 반론을 폈다. 김완희의 제3의학 담론은 이후 경희대 한의대의 교육목표가 되었으며 이를 벤치마킹하여 여러 후발 대학에서도 제3의학을 한의대 교육목표에 담았다.

3) 1980년대 이후의 한의생리학

이처럼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한의생리학 분야는 윤길영의 생리학 담론과 김완희의 ‘제3의학’ 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시도들이 넘쳐나 한의학 전체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의생리학의 이런 역할은 1980년대 중반부터 형성된 ‘민족의학’이라는 복고주의 바람과 중의학의 영향에 눌려 점차 자리를 잃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중의학 교재는 거의 대부분의 한의학 교과서 집필에 영향을 미쳐 한국 한의학 교과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1993년 2월에 출판된 「동의생리학」 교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 공통교재는 윤길영의 「生理學新講」, 김완희의 「新生理學總論」, 「臟腑生理學」 등 이전 교과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중의학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된 교과서였다. 물론 학문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중의학 교재가 한의학 교과서 저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윤길영과 김완희가 쌓아놓은 한국 한의생리학의 전통이 한순간에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 결과 지금 생리학 분야에는 ‘한의생리학’하면 금세 떠올릴 수 있는 뚜렷한 연구 흐름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생리학회도 김완희 이후 한의학계의 전체 방향을 주도할 수 있는 담론 생산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 한의학계에 보완대체의학 붐이 일어났다. 보완대체의학은 기본적으로 한의학의 약물, 침구치료를 보완대체의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이 치료법들에 대해 유효성과 안전성을 연구하여 이것이 입증된 치료법들을 주류의학에 편입시켜 국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정책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1960년대부터 미국에 불기 시작한 뉴에이지(New Age) 운동과 이 운동 참여자들의 ‘건강의 자기 결정권’ 요구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서구사회의 과학기술 지향성과 비인간화를 비판하고 생의학이 요구하는 의사 중심의 진료행태와 환자로서의 수동성 요구를 거부했다.29) 이와 함께 이들이 눈을 돌린 것이 한약, 침술, 명상, 요가, 동종요법 등 비주류 치료법이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1960년대 이후 질병 양상이 감염성 질환으로부터 만성, 퇴행성 질환으로 이행되기 시작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보완대체의학 치료법은 생의학 치료법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는 유익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로서는 보완대체의학 치료법이 무분별하게 오남용되는 현실을 방치할 수 없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1992년 국립보건원(NIH) 산하에 보완대체의학 관리기구를 신설하고 이 기구를 통해 보완대체의학 연구를 추동하도록 했다. 이들이 수행했던 보완대체의학 연구의 주된 관심은 이 치료법의 유효성(efficacy)과 안전성(safety)이었다. 당연히 이들의 연구에서 한의학 이론은 관심 밖에 있었다.30)

2000년대 초반에는 근거중심의학(EBM, Evidence Based Medicine)이 한의학계에 도입되면서 한의학 임상분야에도 근거중심의학이 중요한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31) 이로 인해 과거에는 한의학 고전들이 한의사들 임상의 주요 근거였다면 최근에는 논문과 교과서가 임상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한의사들의 임상에서 양진한치가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한의학 기초이론의 위상과 역할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다른 기초한의학 분야도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생리학 전공 대학원생 수가 많이 줄어들었고, 생리학 전공 안에서도 한의학 기초이론을 연구하는 학생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의학 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한의생리학은 교육과정 상의 교과목으로만 존재하게 되고 연구분야로서 한의생리학은 사라지게 된다.

4) 한의생리학의 현재 상황

지금 한의생리학을 둘러싼 환경은 생리학회 설립 초기와 많이 다르다. 지금은 1970~80년대와는 다른 한의학 담론이 한의계를 지배하고 있다. ‘과학화’, ‘표준화’, ‘EBM’, ‘보완대체의학’, ‘통합의학’, ‘의료일원화’ 같은 것들이 중요한 키워드다. 한의학 연구도 이른바 한의학 이론을 개입시키지 않고 약물이나 침구치료의 임상적 효능(유효성과 안전성)을 과학적 방법으로 직접 연구하는 ‘廢醫存藥’ 방식의 과학화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과학문화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변화다. 우리는 과학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실증적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면서 지금 각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생리학 분야의 교육내용이 시대적 변화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고, 또 임상 한의사들에게 필요한 한의학 기초 이론 지식을 공급하고 있는가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연구에서 거둔 성과가 교육에 피드백(feedback) 될 수 없는 연구 따로 교육 따로인 현재 상황은 생리학 교육 내용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특히 공통교재는 미래세대인 학생들이 생리학 분야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얼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재는 생리학 분야에 대해 특별한 첫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공통교재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며, 다른 교과목과 차별되는 생리학만의 참신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생리학 분야는 학문후속세대를 확보하는 데 지금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5) 한의생리학의 새로운 변화 필요성과 생리학회의 역할

지금은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여 한의생리학 분야의 새로운 연구와 교육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절실한 때다. 생리학회가 이 같은 한의생리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한의생리학의 새로운 연구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리학회안에서 많은 토론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은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지금 생리학회 안에는 합의가 어려울 만큼의 서로 다른 학문적 입장들이 존재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한의학’이 우리에게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윤길영, 김완희가 한때 추진했다가 80년대에 중단되어 버린 한의학 담론이 일종의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한의학’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과거 생리학은 이런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먼저 단절되어 있는 생리학의 학맥을 다시 이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의학 전체로는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한의학으로 변화하는 것이 이 시대 한의학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실증적이란 반증가능성이 없는 관념적인 내용이 아니라 EBM과 같이 구체적인 데이터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내용으로 한의학을 채우는 것을 말한다. 한의생리학도 원전 중심의 관념적인 한의학 이론에서 탈피하여 전통적인 한의학 이론을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이론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현대한의학의 임상에 부응하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이론적 모델을 생산해야 한의생리학도 살아남을 수 있다.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한의학 또는 한의생리학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성과 목적을 가져야 할까? 한의생리학 분야의 형성과 방향성은 현대한의학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 한의학은 20세기를 지나오면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전통의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존폐 위기에 몰렸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 임상가와 연구자들은 전통의학을 존폐 위기에서 지키기 위한 고민을 담은 몇 가지 발전 담론들을 생산했다. 이들은 전통의학의 생존을 위해 과학을 전통의학 속으로 받아들였고, ‘과학화’, ‘현대화’를 전통의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변화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부분 서양의학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모색했다. 그 담론은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요약될 수 있다.32)

첫째는, 한의학을 지키기 위해 서양의학 속에서 한의학을 지지하는 내용을 찾아내어 한의학의 가치를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중국의 ‘衷中參西’와 같은 유형이다. 이 유형은 중국에서 중국의 전통학문과 ‘國粹’를 보존하길 원했던 국수주의자들의 시도와도 궤를 같이 한다. 이들의 관심은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相同點과 相通點을 찾아 한의학이 서양의학과도 상통할 수 있는 현대적인 학문임을 부각하고 이를 통해 한의학이 이 시대에도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견강부회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둘째는, 동서양 의학의 장점을 결합하여 새로운 의학을 만들자는 ‘新醫學’ 유형이었다. 이 유형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점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즉, 한의학의 장점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찾아내고 이것을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의학을 만들어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하면 한의학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여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유형의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의 중서의결합이다. 이들은 중의학의 장점으로 辨證을 꼽았고 서양의학의 장점으로 辨病을 꼽았다.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형태의 임상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중의학은 변증이라는 고유의 영역을 확보하여 생존에 성공했다.

셋째는, 약물과 침구 등 당시에 대중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던 임상적인 효과를 과학화함으로써 한의학의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이었다. 이들은 과학이라는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당시 비과학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한의학 이론은 포기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전략은 서양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에게도 일부 지지를 받았다. 이른바 ‘廢醫存藥’ 유형이었다. 이 유형은 1930년대 중국 중의학계의 급진적인 인사들로부터 나왔다.

이 세 가지 유형의 한의학 담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수주의(한의학을 중심으로 서양의학 이용, 東上西下) 관점에서부터 신의학(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동등한 결합, 東西同等), 그리고 폐의존약(서양의과학을 기준으로 한의학을 평가하고 이용, 西上東下)의 관점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한의생리학이 지향할 수 있는 방향성과 목적을 모두 담고 있다. 전통적인 한의학 이론을 지키는데 목적을 두고 서양의학에서 상동점, 상통점을 찾아내어 한의학 이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한의학 이론만의 고유한 장점을 찾아내어 서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데 연구의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유형을 기초로 윤길영과 김완희의 생리학 담론을 평가한다면 어떨까? 윤길영은 조헌영의 한의학론에 깊이 감화되어 한의학에 입문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30년대 동서의학 논쟁 당시의 조헌영의 의학론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고 미래의 한의학 발전 방향으로 인정받았다. 윤길영도 이에 공감하여 한의학계에 입문했고 본격적으로 한의학 연구에 뛰어 들었다.

조헌영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비교를 통해 한의학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를 부각시키려 노력했다.33) 우리가 잘 아는 종합치료 의술과 국소처치 의술, 자연치료 의술과 인공치료 의술, 조직의학과 현상의학, 정체의학과 동체의학, 치본의학과 치표의학, 방어의술과 양생의술, 내과의학과 외과의학, 획일주의와 응변주의, 귀족의술과 평민의술, 관용의술과 민용의술 같은 대비가 대표적인 사례다.34)

또한 조헌영은 자연적, 과학적 방법이 많이 채택된 한의학을 주장했고, 이를 통해 한의학이 발전하면 이는 종래의 한의학이 아닐 것이고,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종합, 즉, 정(한의학), 반(양의학), 합(신 종합치료의학)의 법칙에 의해 새로운 신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5) 즉, 조헌영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비교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찾고 이를 종합하여 새로운 의학을 건립하자는 주장을 했다.

윤길영의 생리학과 관련된 초기 논문인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1955), <漢方生理學의 方法論 硏究>(1966)를 보면 조헌영의 그림자가 많이 보인다. 윤길영의 생리학에도 과학적 ‘한방생리학’, 동서생리학에 대한 상보적 관점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윤길영의 생리학은 두 번째의 신의학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윤길영이 ‘漢醫學의 客觀化와 漢洋方病名統一을 爲한 方法’36)이라는 논문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완희의 ‘제3의학론’은 형식적으로는 신의학 유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김완희가 저술한 교재 또한 서양의학 지식으로 교재 전체 내용을 채우는 파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결합을 시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김완희가 지향했던 연구방향은 기본적으로 첫 번째 유형에 가깝다. 김완희의 주된 관심사는 서양의학에서 유기능이론, 유기능체계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는데 있었다. 이런 경향은 「장부생리학」, 「신판장부생리학」 교재 내용에 잘 나타난다.

앞의 세 가지 유형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의 한의생리학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할까?

먼저 세 번째 유형(폐의존약)은 한의학 이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한의학의 임상적 성공의 배후에는 한의학 이론이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한의학 이론 중에는 옥석이 섞여 있어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이론이라는 잣대를 통해 옥석을 가릴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한의학 이론 전체를 폐기하는 것은 한의학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어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첫 번째 유형은 그 자체로 학술적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 방향은 필연적으로 견강부회로 이끈다는 한계가 있다. 한의학 이론을 지키는데 목적을 두면 한의학 이론과 맞지 않는 지식들은 주목하지 않거나 은연 중에 배제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간과 담의 상관성에 대한 실험적 연구’, ‘폐와 대장의 상관성에 대한 실험적 연구’ 등이 이런 유형의 연구들이다. 이런 연구들에서는 연구 가설을 지지하는 실험결과들은 적극적으로 부각하지만 이와 무관한 결과들은 무시하거나 배제함으로써 논리적 결함을 만들어낸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유형의 연구는 한때 많이 유행했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그렇다면 가장 유망한 것은 두 번째의 유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가 20세기의 낭만적인 한의학 담론으로 21세기를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실제 연구에 접어들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발견될 것이다. 또 서양의학과의 결합을 논하기 이전에 한의학 이론이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이론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 연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또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임상적으로 만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나 이론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임상에서와는 난이도 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런 작업은 한, 두 연구자의 노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생리학회 전체가 힘을 모아도 어려운 일이다. 생리학회가 많은 토론을 통해 한의생리학의 미래방향을 찾아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의학의 미래 담론을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결 론

생리학회의 50년을 돌아보면 각 시대마다 생리학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었고 우리의 선배들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이후 민족의학, 중의학, 보완대체의학과 통합의학 담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맡겨진 새로운 사명이 있다. 한의생리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의학 이론을 다루는 생리학 분야는 한의학 이론을 과학적, 합리적, 실증적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현대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임상을 이론적으로 잘 뒷받침해야 할 책임도 막중하다. 생리학회가 윤길영과 김완희의 과학적이고 현대화된 생리학을 향한 노력을 다시 되새겨 한의학계 안에서 이전의 중심 역할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모쪼록 생리학회 50주년이 앞으로의 50년 기틀을 잡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Notes

1) 한의생리학은 초기 교육과정에서는 ‘漢方生理學’이라는 과목명으로 개설되었다. 이 글에서는 학회명은 현재 학회의 공식적인 명칭인 ‘대한동의생리학회’로, 교과목명이나 학문분야 이름으로는 ‘한의생리학’을 사용하였다. 1986년에 의료법을 개정하여 한의학 관련 용어는 모두 ‘韓’을 붙여 ‘韓醫學’, ‘韓藥, ‘韓醫師’, ‘韓醫院’ 등으로 표기하기로 하였으므로 생리학도 ‘韓醫生理學’ 또는 ‘한의생리학’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漢醫’에서 ‘韓醫’로 자구변경되는 과정은 대한한의사협회가 발간한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2012) 408~411쪽에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2) 2006년 5월 25일자 한의신문에는 임일규가 기고한 ‘한의학 개척자5 윤길영’이 실려 있는데 이 기고문에서 한의학과 8기생(1955년 입학)인 필자는 현곡 윤길영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1학년 한방생리학 강의 시간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같은 8기생인 김완희도 필자와의 대화에서 같은 내용을 말한 바 있다. (임일규. ‘한의학 개척자5 尹吉榮(1911~1987)’ 2006년 5월 25일자 한의신문기사. 한의신문 취재팀 제공)
3)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총동문회.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50년사 및 교우명부. 서울, 1998, pp.28-30.
4)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50년사 및 교우명부, p.339, 405.
5) 대한한의사협회.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서울, 2012. p. 306.
6)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pp. 489-490.
7)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p. 306.    대한한의학회 분과학회 규정. 동의생리학회지 창간호(1983) 부록에 이 규정이 실려 있다.
8)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p. 306.
9) 대한한의학회 분과학회 규정. 동의생리학회지 창간호 부록
10)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p. 306.      대한한의사협회사에는 한방생리학회(회장 김완희)가 1975년 11월 28일, 한방병리학회(회장 문준전)가 1976년 3월 23일 구성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글에서의 생리학회 창립 일자는 대한한의사협회사를 따랐다.
11) 대한한의학회 분과학회 규정. 동의생리학회지 창간호 부록, 1983.
12) 양기상. 창간사. 동의생리학회지 창간호, 1983.
13)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 pp. 407-410.
14) 동의생리학회지 3권 2호(통권4권, 1988) 65-89쪽에는 제1회 하계학술세미나 일정표와 발표 원고가 실려 있다.
15) 동의생리병리학회지 홈페이지(https://kmpath.jams.or.kr/co/main/jmMain.kci) 학회현황정보 참고
16) 이 파트의 내용은 필자의 논문 ‘玄谷 尹吉榮의 「漢方生理學의 方法論 硏究」 재 조명. 동의생리병리학회지 23(4), 2009, pp.751-760.’에서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논문의 일부 내용을 가져와 내용을 작성하였다.
17)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 東洋醫藥 創刊號. 1955. pp.53-54.
18)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 p.53.
19)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理論과 方法. p.53.
20) 윤길영의 이 논문은 우리에게는 1966년 6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총 5회에 걸쳐 <大韓漢醫學會報>에 게재된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의 각주에는 이 논문이 경희대학교 논문집 제4집에 이미 발표된 바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제3의학> 창간호(1996년 1월) 205-206쪽에 실린 「玄谷선생님 年譜槪略」에는 1962년에 이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런 기술들을 보면 이 논문이 1966년보다 앞선 시기에 쓰여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다만 이 글에서는 우리가 확인가능한 <大韓漢醫學會報>(1966-1967) 게재된 논문을 기준으로 표시하였다.
21)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方法論硏究(完). 大韓漢醫學會報 1967년 3월호, 大韓漢醫學會, 1967. p.15.
22)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方法論硏究(完). p.15.
23) 尹吉榮. 漢方生理學의 方法論硏究(完). p.15.
24) 김완희. 신생리학총론.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방생리학교실, 1975. 신생리학총론 최초 발간년도는 1997년 김완희 교수의 정년 기념 특집호로 발간된 동의생리학회지 12(2)의 약력에 기재된 연도인 1972년을 따랐다.
25) 김완희. 장부생리학.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방생리학교실, 1972.
26) 김완희. 신판장부생리학.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한방생리학교실, 1978. 신판장부생리학 최초 발간년도는 1997년 김완희 교수의 정년 기념 특집호로 발간된 동의생리학회지 12(2)의 약력에 기재된 연도인 1973년을 따랐다.
27) 김완희. 신생리학총론. 1975년 3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문.
28) 김완희. 신판장부생리학. 1978년 8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문.
29) 조병희. 생의학과 한의학의 사회적 관계: 갈등과 통합. 의철학연구 vol.2, 2006, pp.86-88.
30) Chapter 2. Overview of CAM in the United States: Recent History, Current Status, And Prospects for the Future: White House Commission on 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Policy. Final Report. pp.40-59, 2002.
31) Shea JL. Applying evidence-based medicine to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debate and strategy. J Altern Complement Med. 2006 Apr;12(3):255-263.
32) 이 파트에서 사용한 세 가지 유형의 한의학 발전 담론은 20세기 전반 중서의회통 의가들이 논쟁과정에서 주장한 내용에서 가져온 것이다. 한국의 1930년대 동서의학 논쟁에서도 유사한 유형의 주장들이 관찰된다. 그리고 이후의 한의학 과학화, 현대화 논의에서 제안된 한의학의 발전방향들도 크게 보면 이 세 가지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세 종류의 중서의회통 유형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중국의 중서의회통파에 대한 연구동향과 한국 한의계가 얻을 수 있는 교훈. 한국의사학회지 30(2), 2017, pp.13-31.’을 참고하기 바란다.
33) 전혜리. 1934년 한의학 부흥 논쟁-한의학 정체성의 ‘근대적’ 재구성. 한국과학사학회지 33(1): 41-89.
34) 조헌영. 통속한의학원론. 대한한방의우회, 1975, pp.21-38.
35) 조헌영. 신의학의 발전과 한의학의 금후. 조헌영외 지음.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 소나무, 1997, p.228.
36) 윤길영의 이 논문은 대한한의학회지 1972: 秋號에 게재되었다. 여기서는 이 논문의 오탈자를 수정하여 다시 게재한 ‘尹吉榮. 漢醫學의 客觀化와 漢洋方病名統一을 爲한 方法. 제3의학 1(2), 1996, pp.1-14.’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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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List of presenters and presentation titles for the 1st Summer Seminar14)

발표자 제목(전체 주제: 진액과 체액대사)
송점식 진액의 생성과 운용
류도곤 체액대사
신민규 체액, 체액대사
황인수 체액대사와 부종에 관한 사상체질론적 고찰
최병일 부종 발생의 체질적 특징
김광중 부종의 변증진단

Table 2.

Annual publication records and presidency of the Journal of Oriental Medical Physiology

발간연도 일자 권호 회장 게재논문편수
1983 06.20. 창간호 양기상 8
1987 12월 2권1호 신민규 4
1988 07.20. 3권1호 신민규 5
89.01.28. 3권2호 신민규 6
1989 12.25. 4권1호 신민규 9
1990 12.25. 5권1호 김용희 10
1991 12.26. 6권1호 김용희 7
1992 12.29. 7권1호 김길훤 12
1993 12.03. 8권1호 김길훤 6
1994 07.05 9권1호 김원종 8
12.03 9권2호 김원종 4
1995 08.31. 10권1호 김원종 7
12.30. 10권2호 김원종 5
1996 08.03. 11권1호 홍무창 9
12.03. 11권2호 홍무창 14
1997 08.30. 12권1호 홍무창 12
12.03. 12권2호 홍무창 11
1998 08.29. 13권1호 홍무창 11
1999 03.31. 14권1호 홍무창 14
09.30. 14권2호 홍무창 19
2000 03.31. 15권1호 김광중 13
09.03. 15권2호 김광중 9
2001 병리학회와 함께 동의생리병리학회지로 통합 발간. 15권1호로 시작.